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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플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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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스 플랑크는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1858년 킬에서 태어나 1947년 괴팅겐에서 사망했다. 그는 흑체 복사 연구를 통해 에너지 양자화 개념을 도입하여 양자역학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플랑크는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의 영향으로 이 이론이 독일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했다. 그는 또한 독일 물리학회 회장, 카이저 빌헬름 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과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나치 정권 시기에도 과학자들을 보호하려 노력했다. 플랑크는 종교와 과학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자연 단위의 개념을 제시하는 등 철학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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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플랑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8년 휴고 에르푸르트의 막스 플랑크 사진
1938년 플랑크
본명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
출생일1858년 4월 23일
출생지독일 연방 홀슈타인 공국 킬
사망일1947년 10월 4일
사망지연합군 점령하 독일 니더작센주 괴팅겐
국적독일인
로마자 표기maks ˈplaŋk
학력
교육뮌헨 대학교 (박사, 1879)
베를린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제목기계적 열 이론의 제2 원리에 대하여
박사 학위 논문 URLhttps://edoc.hu-berlin.de/handle/18452/734
박사 학위 취득 년도1879년
지도 교수알렉산더 폰 브릴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헤르만 폰 헬름홀츠
박사 제자에리히 크레치만
구스타프 헤르츠
율리우스 에드거 릴리엔펠트
막스 아브라함
막스 폰 라우에
모리츠 슐리크
발터 쇼트키
발터 보테
발터 마이스너
리처드 베커
주요 제자볼프강 쾰러
리제 마이트너
경력
분야물리학
근무 기관킬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카이저 빌헬름 협회
업적
주요 업적양자 이론
푸랑크 상수
푸랑크의 법칙
수상
수상 내역노벨 물리학상 (1918)
미국 국립 과학원 외국인 회원 (1926)
로렌츠 메달 (1927)
코플리 메달 (1929)
막스 플랑크 메달 (1929)
괴테상 (1945)
푸르 르 메리트 훈장 (1915)
프랭클린 메달 (1927)
개인 정보
배우자마리 메르크 (1887년 결혼; 1909년 사망)
마르가 폰 회슬린 (1911년 결혼)
자녀5명
막스 플랑크 서명

2. 생애와 경력

젊은 시절의 플랑크 (1878년경)


1874년 뮌헨 대학교에 입학한 플랑크는 뮌헨의 물리학 교수 필립 폰 욜리에게 물리학에 대해 조언을 구했지만, 욜리는 "이 분야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이미 발견되었고 남은 것은 몇 개의 구멍을 채우는 것뿐"이라며 물리학 연구를 만류했다.[253] 플랑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보다 알려진 기초를 이해하고 싶다고 답하고, 욜리의 감독 아래 가열된 백금을 통한 수소확산을 연구하는 실험을 수행했지만, 곧 이론물리학으로 전향했다.

1877년, 플랑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헤르만 폰 헬름홀츠,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등 저명한 학자들과 함께 1년간 연구했다. 그는 헬름홀츠의 강의는 준비가 부족하고 느렸으며, 키르히호프의 강의는 꼼꼼했지만 건조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헬름홀츠와는 곧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베를린에서 플랑크는 클라우지우스의 저서를 탐독하며 열역학을 자신의 연구 분야로 확립했다.

1878년 10월, 플랑크는 자격 시험에 합격했고, 1879년 2월에는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하여(Über den zweiten Hauptsatz der mechanischen Wärmetheorie)"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잠시 뮌헨의 이전 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1880년, 플랑크는 "서로 다른 온도에서 등방성 물체의 평형 상태(Gleichgewichtszustände isotroper Körper in verschiedenen Temperaturen)"라는 논문을 통해 하빌리타치온을 획득하며 유럽에서 가장 높은 두 학위를 모두 취득했다.[249]

2. 1. 출생과 가계

플랑크는 전통적이고 지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와 조부는 모두 괴팅겐의 신학 교수였고, 그의 아버지는 킬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의 법학 교수였다. 그의 삼촌 중 한 명은 판사였다.[249]

막스 플랑크의 10살 때 서명


플랑크는 1858년 홀슈타인에서 요한 율리우스 빌헬름 플랑크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엠마 파치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마르크스 플랑크'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10살 때 '막스'라는 이름으로 서명하고 평생동안 이 이름을 사용했다.[251]

그는 가족의 6번째 아이였고, 그의 형제 중 두 명은 아버지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났다. 플랑크의 초기 기억 중 하나는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동안 킬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군대가 행군한 것이었다.[249] 1867년 가족은 뮌헨으로 이사했고, 플랑크는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그는 헤르만 뮐러의 지도를 받았는데, 뮐러는 그에게 천문학역학, 수학을 가르쳤다. 플랑크가 에너지 보존 원리를 처음 배운 것은 뮐러로부터였다. 플랑크는 17세에 조기 졸업했다.[252]

플랑크는 음악에 재능이 있어 노래 수업을 듣고 피아노, 오르간, 첼로를 연주하고 노래와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 대신 물리학을 선택했다.

2. 2. 학창 시절과 물리학 입문

플랑크는 전통적이고 지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와 할아버지는 모두 괴팅겐의 신학 교수였고, 아버지는 킬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의 법학 교수였다. 그의 삼촌 중 한 명은 판사였다.[7]

1858년 4월 23일, 당시 홀슈타인 공국(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항구 도시 에서 요한 율리우스 빌헬름 플랑크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엠마 파치히 사이에서 태어났다.[58] 그는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마르크스 플랑크'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그의 이름 중 ''마르크스''는 "호칭"(appellation name)으로 표기되었다.[8] 그러나 10살 때 '막스'라는 이름으로 서명하고 그 후 평생동안 이 이름을 사용했다.[9][251]

그는 가족의 여섯 번째 아이였지만, 그의 형제 자매 중 두 명은 아버지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났다. 플랑크의 어린 시절에는 전쟁이 흔했으며, 그의 가장 초기 기억 중 하나는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군대가 킬에 진주한 것이었다.[7] 1867년 가족은 뮌헨으로 이사했고, 플랑크는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수학자 헤르만 뮐러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에게 천문학역학뿐만 아니라 수학도 가르쳤다. 플랑크는 뮐러에게서 에너지 보존 원리를 처음으로 배웠다. 플랑크는 17세에 조기 졸업했다.[12] 이것이 플랑크가 물리학 분야와 처음 접한 방법이다.

플랑크는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는 노래 레슨을 받았고 피아노, 오르간, 첼로를 연주했으며 노래와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 대신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선택했다.[66]

1874년 플랑크는 뮌헨 대학교에 입학했다. 뮌헨의 물리학 교수인 필립 폰 욜리는 플랑크에게 "이 분야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이미 발견되었고 남은 것은 몇 개의 구멍을 채우는 것뿐"이라며 물리학에 입문하지 말라고 조언했다.[253] 플랑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의 알려진 기초를 이해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했고, 욜리의 감독하에 플랑크는 가열된 백금을 통한 수소확산을 연구하는 그의 과학 경력의 유일한 실험을 수행했지만 이론물리학으로 옮겼다.[13]

1877년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구스타프 키르히호프 그리고 수학자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와 함께 1년 동안 공부했다. 그는 헬름홀츠는 준비가 제대로 된 적이 없고, 천천히 말하고, 끝없이 잘못 계산되어 청중을 지루하게 하는 반면, 키르히호프는 주의깊게 준비되었지만 건조하고 단조로운 강의를 했다고 썼다. 그는 곧 헬름홀츠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클라우지우스의 저작에 대한 대부분의 독학 프로그램에 수행하여서, 열역학을 자신의 분야로 선택하도록 되었다.

1878년 10월 플랑크는 자격 시험에 합격했고, 1879년 2월에는 그의 박사 논문 ''Über den zweiten Hauptsatz der mechanischen Wärmetheorie''(''기계적 열이론의 제2법칙에 관하여'')를 발표했다. 그는 뮌헨의 그의 전 학교에서 잠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1880년까지 플랑크는 유럽에서 제공되는 두 개의 최고 학위를 취득했다. 첫 번째는 그가 그의 열역학 연구와 이론을 상세히 설명한 논문을 완성한 후 받은 박사 학위였다.[7] 그 후 그는 ''Gleichgewichtszustände isotroper Körper in verschiedenen Temperaturen''(''다른 온도에서 등방성 물체의 평형 상태'')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으로 그는 하빌리타치온을 받았다.

2. 3. 학위 취득과 교수 임용

플랑크는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완성하고 뮌헨에서 무급 프리바트도첸트(독일 대학에서 강사/조교수에 해당하는 지위)가 되었다. 그는 학업 제안을 받을 때까지 기다렸지만, 처음에는 학계에서 무시당했다. 그러나 열 이론 분야에서 그의 작업을 더욱 발전시켜 기브스와 같은 열역학적 형식론을 자신도 모르게 차례로 발견했다. 엔트로피에 대한 클라우지우스의 아이디어는 그의 작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254]

1885년 4월, 킬 대학교는 플랑크를 이론물리학 부교수로 임명했다. 특히 물리화학에 적용되는 엔트로피와 그 처리에 대한 추가 연구가 뒤따랐다. 그는 1897년에 "열역학에 관한 논문"을 출판했다.[254] 그는 스반테 아레니우스전해질 해리 이론에 대한 열역학적 기초를 제안했다.

1889년, 플랑크는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스-대학교에서 키르히호프의 직위를 계승했으며,[255] 1892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1907년, 플랑크는 에서 볼츠만의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베를린에 남기 위해 거절했다. 1909년,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뉴욕시 컬럼비아 대학교 이론물리학의 어니스트 켐프턴 아담스 강사(Ernest Kempton Adams Lecturer)로 초빙되었다. 그의 강의는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A. P. 윌리스A. P. Wills에 의해 번역 및 공동 출판되었다.[256] 1914년 미국국립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257] 1926년 1월 10일 베를린에서 은퇴했다.[258] 에르빈 슈뢰딩거가 그의 뒤를 이었다.[259] 그는 1926년 미국국립과학원 회원, 1933년 미국 철학 협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60][261]

2. 4. 가족

플랑크는 전통적이고 지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증조부와 외조부는 모두 괴팅겐의 신학 교수였고, 그의 아버지는 킬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의 법학 교수였다. 그의 삼촌 중 한 명도 판사였다.[249]

플랑크는 1858년 홀슈타인에서 요한 율리우스 빌헬름 플랑크Johann Julius Wilhelm Planck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엠마 파치히Emma Patzig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마르크스 플랑크Karl Ernst Ludwig Marx Planck''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이름 중 ''마르크스Marx''(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마르쿠스Markus''의 변형이거나 실제로 ''막시밀리안Maximilian''의 약자인 막스Max의 오류일 수 있음)는 "명칭 이름(appellation name)"으로 표시되었다.[250] 그러나 10살이 되었을 때 그는 ''막스Max''라는 이름으로 서명하고 그후 이것을 평생동안 사용했다.[251]

그는 가족의 6번째 아이였지만, 그의 형제 자매 중 두 명은 아버지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났다.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은 플랑크의 어린 시절 흔한 일이었고, 그의 가장 초기 기억 중 하나는 1864년 전쟁 동안 킬로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군대의 행군이었다.[249]

1887년 3월 플랑크는 학교 친구의 여동생인 마리 머르크Marie Merck(1861-1909)와 결혼하여 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들은 카를Karl(1888~1916), 쌍둥이 엠마Emma(1889~1919)와 그레테Grete(1889~1917), 에르빈Erwin(1893~1945) 등 5명의 자녀를 두었다.

베를린에 있는 아파트 이후, 플랑크 가족은 반겐하임 거리(Wangenheimstrasse) 21번지의 베를린-그루네발트(Berlin-Grunewald)에 있는 빌라에서 살았다. 베를린 대학교의 다른 여러 교수가 근처에 살았으며 그 중에는 플랑크의 절친한 친구가 된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도 있었다. 곧 플랑크의 집은 사회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와 같은 수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자주 방문했다. 공동 연주 음악의 전통은 이미 헬름홀츠의 고향에서 확립되었다.

행복한 몇 년 후인 1909년 7월에 마리 플랑크는 아마도 결핵으로 사망했다. 1911년 3월 플랑크는 두 번째 부인인 마르가 폰 회슬린Marga von Hoesslin(1882–1948)과 결혼했다. 12월에는 다섯 번째 아이 헤르만Hermann이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플랑크의 차남 에르빈은 1914년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그의 장남 카를은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레테는 1917년 첫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여동생인 엠마는 그레테의 홀아비와 결혼했는데 2년 후 같은 방식으로 사망했다. 두 손녀 모두 생존했으며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플랑크는 이러한 상해들을 꿋꿋하게 견뎌냈다.

1945년 1월, 그가 특히 가까웠던 에르빈은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시도 실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나치 인민법정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르빈은 1945년 1월 23일 처형되었다.[262]

3. 연구 업적

플랑크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스 대학교(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교수로 재직하며 지역 물리학회에 가입했다. 그는 이 시기에 대해 "그곳에서 나는 본질적으로 유일한 이론 물리학자였으며, 엔트로피를 언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이 쉽지 않았다. 그것은 수학적인 유령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263] 그의 주도로 1898년 독일의 다양한 지역 물리학회가 통합되어 독일 물리학회(Deutsche Physikalische Gesellschaft, DPG)가 창립되었고, 1905년부터 1909년까지 플랑크는 회장을 역임했다.

플랑크는 킬 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 부교수로 임명된 후, 물리화학에 적용된 엔트로피와 그 처리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1897년에는 『열역학 논문』을 출판했고,[14] 스반테 아레니우스전해질 해리 이론에 대한 열역학적 기초를 제안했다.

1889년, 플랑크는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키르히호프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15] 1892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1907년 에서 루트비히 볼츠만의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베를린에 남기 위해 거절했다. 1909년, 그는 뉴욕시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어니스트 켐프턴 아담스 이론물리학 강사로 초빙되어 강의를 했고, 이 강의는 번역되어 출판되었다.[16] 1926년 은퇴할 때까지 베를린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18] 그의 자리는 에르빈 슈뢰딩거가 계승했다.[19]

플랑크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대중의 열광에 동조하며 "끔찍한 것 외에도 예기치 않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 모든 정당의 통합 ... 선하고 고귀한 모든 것에 대한 찬사"와 같은 글을 남겼다.[35][36] 또한, 논쟁적인 전쟁 선전물인 "93인의 성명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3. 1. 흑체 복사 연구와 플랑크 법칙 발견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명판에는 "기본적 작용의 양자 ''h''의 발견자인 막스 플랑크가 이 건물에서 1889년부터 1928년까지 가르쳤다."라고 새겨져 있다.[263]

1894년 플랑크는 흑체 복사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1859년 구스타프 키르히호프는 "흑체(완벽한 흡수체, 공동 복사체라고도 함)에서 방출되는 전자기 복사의 강도는 복사의 주파수 (즉, 빛의 색깔)와 그 물체의 온도에 의존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182] 이 질문은 실험적으로 탐구되었지만, 실험 값과 일치하는 이론적 취급은 없었다. 빌헬름 빈은 빈의 법칙을 제안했는데, 이는 고주파에서는 거동을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저주파에서는 실패했다.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식인 레일리–진스 법칙은 저주파에서의 실험 결과에 일치했지만 고주파에서 "자외선 파탄"으로 알려진 현상을 만들었다.[265]

1899년 플랑크는 "기본 무질서의 원리"를 통해 이상적인 진동자의 엔트로피에 대한 여러 가정으로부터 빈의 법칙을 유도하여 빈-플랑크 법칙을 만들었다. 그러나 곧 실험적 증거가 새로운 법칙을 전혀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 발견되어 플랑크는 좌절했다. 플랑크는 접근 방식을 수정하여, 실험적으로 관찰된 흑체 스펙트럼을 잘 설명하는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의 첫 번째 버전을 유도했다. 그것은 1900년 10월 19일 물리학회(DPG) 회의에서 처음 제안되었고 1901년에 출판되었다. 이 첫 번째 유도는 에너지 양자화를 포함하지 않았으며 통계 역학을 사용하지 않았다.[265]

1900년 11월, 플랑크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루트비히 볼츠만의 통계적 해석에 의거하여 이 첫 번째 접근 방식을 수정했다. 플랑크는 "그것은 절망의 행위 ... 나는 물리학에 대한 나의 이전 신념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고 회고했다.[265]

1900년 12월 14일 물리학회(DPG)에 제출된 그의 새로운 유도의 중심 가정은 이제 플랑크 가설로 알려진 가정은 전자기 에너지가 양자화된 형태로만 방출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에너지는 기본 단위의 배수일 뿐이었다.

:E = h\nu

여기서 ''h''는 플랑크 상수이며 플랑크의 작용 양자라고도 하며 (1899년에 이미 도입됨), ''ν''는 복사의 주파수이다. 여기서 논의된 에너지의 기본 단위는 ''hν'' 로 표시된다. 물리학자들은 이제 이러한 양자 광자를 부르고 주파수 ''ν''의 광자는 고유한 에너지를 갖는다. 그러면 해당 주파수의 총 에너지는 해당 주파수의 광자 수를 곱한 ''hν'' 와 같다.

플랑크는 처음에 양자화가 "순전히 형식적인 가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날 고전 물리학과 양립할 수 없는 이 가정은 양자 물리학의 탄생이자 플랑크 경력의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로 간주된다.[266] 플랑크 상수의 발견으로 그는 양자 이론의 대부분이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보편적인 물리적 단위 집합(플랑크 길이플랑크 질량과 같은)을 정의할 수 있었다. 플랑크는 새로운 물리학 분야에 대한 근본적인 공헌을 인정받아 191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실제로는 1919년에 수상했다).[267][266]

플랑크는 1918년에 양자 이론에 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플랑크는 에너지 양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행동 양자를 고전 이론으로 어떻게든 재통합하려는 나의 무익한 시도는 몇 년에 걸쳐 연장되었고 나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라고 회고했다.[268]

막스 보른은 플랑크에 대해 "그는, 천성이, 보수적인 마음이며; 그는 전혀 혁명적이지 않았고 사색에 대해서는 철저히 회의적이었다. 그런데도 사실로부터 논리적 추론의 설득력 있는 힘에 대한 그의 믿음이 너무나 강해서 물리학을 뒤흔든 가장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244]

흑체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전자기파를 반사하지 않고 흡수하는 물체이다.[181] 이 흑체에 열을 가했을 때 스스로 방출하는 전자기파가 흑체복사(흑체 방사)이다. 흑체복사의 에너지는 흑체의 재질이나 모양에 관계없이 온도와 진동수만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1860년에 키르히호프에 의해 확인되었으며, 그 이전부터 도예가들은 가마에서 나오는 빛의 색, 즉 파장(진동수의 역수)은 내부에 있는 물체에 관계없이 온도만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82][183]

플랑크는 작은 선형 진동자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1899년, 이 진동자가 흑체복사와 상호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진동수는 에너지를 흡수하고 방출한다. 이 단위 시간당 흡수·방출 에너지를 U라고 할 때, U와 흑체복사의 에너지 분포함수u에는

:u =\frac{8\pi}{c^3}\,\nu^2 U (c는 광속)[185]

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유도해냈다. 이 식에 빌헬름 빈의 빈의 복사 법칙을 대입함으로써 진동자의 평균 에너지 U

:U =h\nu\mathrm{e}^{-a \nu/T}

으로 구할 수 있다. 여기서 h =\frac{bc^3}{8\pi}이며, 이 h는 후에 '''플랑크 상수'''로 불리게 된다. 플랑크는 1899년 논문에서 실험값을 참고하여 h = 6.89 × 10-27 erg·sec로 구했다.[186][187]

1900년, 하인리히 루베르츠와 페르디난트 쿨르바움의 실험으로 빈의 복사법칙이 장파장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190][191] 프리드리히 파셴은 개량된 실험에서 고온에서는 빈의 식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확인하여 플랑크에게 보고했다.[191]

각 파장에 대한 흑체복사 에너지 값의 빈, 레이리-진스, 플랑크의 식 비교


이 실험 결과를 알게 된 플랑크는,

:R =-a\nu U + \frac{1}{k}U^2

로 하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95] 이 식을 적분함으로써

:U =\frac{h\nu}{\mathrm{e}^{a\nu/T} -1}

을 얻고, 더 나아가

:u(\nu,T) =\frac{b\nu^3}{ \mathrm{e}^{a\nu/T} -1}

을 얻는다. 이 식은 1900년에 발표되었다. 발표장에 참석했던 루베르츠는 다음 날 플랑크를 찾아가 플랑크의 식이 실험 결과와 모두 일치한다고 전했다.[192]

3. 2. 양자역학의 탄생과 발전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명판에는 "기본적 작용의 양자 ''h''의 발견자인 막스 플랑크가 이 건물에서 1889년부터 1928년까지 가르쳤다."라고 새겨져 있다.[263]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명판: "기본적 작용의 양자 ''h''의 발견자인 막스 플랑크가 이 건물에서 1889년부터 1928년까지 가르쳤다."


1894년 플랑크는 흑체 복사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1859년 구스타프 키르히호프가 제기한 이 문제는 "흑체(완벽한 흡수체, 공동 복사체라고도 함)에서 방출되는 전자기 복사의 강도는 복사의 주파수 (즉, 빛의 색깔)와 그 물체의 온도에 의존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265] 이 문제는 실험적으로 탐구되었지만, 실험값과 일치하는 이론적 취급은 없었다. 빌헬름 빈은 빈의 법칙을 제안했는데, 고주파에서는 거동을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저주파에서는 실패했다. 이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식인 레일리–진스 법칙은 저주파에서 실험 결과와 일치했지만, 고주파에서는 "자외선 파탄"으로 알려진 현상을 일으켰다.[265]

플랑크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1900년 10월 19일 물리학회(DPG) 회의에서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의 첫 번째 버전을 제안했고, 1901년에 출판했다.[265] 이 법칙은 실험적으로 관찰된 흑체 스펙트럼을 잘 설명했다. 플랑크는 이 법칙을 유도하기 위해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루트비히 볼츠만의 통계적 해석에 의거했다.[265]

플랑크는 전자기 에너지가 양자화된 형태로만 방출될 수 있다는 플랑크 가설을 제시했다. 즉, 에너지는 기본 단위의 배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E = h\nu

여기서 ''h''는 플랑크 상수이며 플랑크의 작용 양자라고도 하며 (1899년에 이미 도입됨), ''ν''는 복사의 주파수이다.[266] 이 에너지의 기본 단위(''hν'')는 오늘날 광자라고 불린다.

플랑크는 처음에 양자화가 "순전히 형식적인 가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가정은 고전 물리학과 양립할 수 없는 양자 물리학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266] 플랑크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실제로는 1919년에 수상했다).[266][267]

플랑크는 에너지 양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고전 이론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268] 막스 보른은 플랑크에 대해 "그는 천성이 보수적인 마음이며, 혁명적이지 않고 사색에 대해 철저히 회의적이었다. 그런데도 사실로부터 논리적 추론의 설득력 있는 힘에 대한 그의 믿음이 너무나 강해서 물리학을 뒤흔든 가장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244]

1920년대 말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을 제시했지만, 플랑크, 에르빈 슈뢰딩거, 막스 폰 라우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를 거부했다.[275] 플랑크는 파동역학이 양자 이론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플랑크는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를 설득하고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가 결국 죽기 때문에 승리한다. 새로운 세대는 그것에 익숙하게 자란다."는 자신의 초기 관찰의 진리를 경험했다.[275]

3. 3. 상대성 이론에 대한 기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플랑크의 직접적인 기여는 원문에 명시되지 않았다. 다만,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지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8년 말, 프로이센 아카데미는 독립성을 잃고 나치에 의해 일체화되었고, 플랑크는 이에 항의하며 회장직을 사임했다.[280]

4. 말년과 유산

막스 플랑크는 독일 루터교 교인이었으며,[283] 대안적인 견해와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했다.[284] 1944년 플랑크는 "물질은 없다. 모든 물질은 원자 입자를 진동시키고 원자의 이 가장 미세한 태양계를 하나로 묶는 힘에 의해서만 발생하고 존재한다. 우리는 이 힘 뒤에 의식적이고 지적인 정신(geist)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정신은 모든 물질의 모체이다."라고 하였다.[287]

1887년 3월, 플랑크는 학교 친구의 여동생인 마리 메르크(1861~1909)와 결혼하여 킬의 임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들에게는 카를(1888~1916), 쌍둥이 엠마(1889~1919)와 그레테(1889~1917), 그리고 에르빈(1893~1945)의 네 자녀가 있었다. 베를린 아파트에서 거주한 후 플랑크 가족은 베를린-그루네발트의 방엔하임슈트라세 21번지에 있는 빌라에 살았다. 베를린 대학교의 다른 여러 교수들이 그 근처에 살았으며, 곧 플랑크의 집은 사회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와 같은 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자주 방문했다.

1909년 7월 마리 플랑크가 결핵으로 사망했다. 1911년 3월 플랑크는 두 번째 아내인 마르가 폰 호에슬린(1882~1948)과 결혼했고, 12월에는 다섯 번째 자녀인 헤르만이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 플랑크의 둘째 아들 에르빈은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혔고, 장남 카를은 베르됭에서 전사했다. 그레테는 1917년 첫 아이를 출산하던 중 사망했다. 그녀의 여동생은 2년 후 그레테의 홀아비와 결혼한 후 같은 방식으로 사망했다. 두 손녀는 살아남았고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45년 1월, 에르빈 플랑크는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시도 실패에 가담한 혐의로 나치 국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5년 1월 23일에 처형되었다.[46]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플랑크, 그의 두 번째 아내, 그리고 그들의 아들은 괴팅겐의 친척에게로 갔고, 플랑크는 1947년 10월 4일에 괴팅겐에서 사망했다. 그는 괴팅겐의 구 시립 묘지(알테 슈타트프리트호프)에 묻혔다.[47]

괴팅겐의 플랑크 묘

4. 1. 제1차 세계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플랑크는 1920년부터 죽을 때까지 교회 관리인이었고, 전능하고 전지전능하며 자비로운 하나님을 믿었다.[286] 그는 종교와 과학이 모두 "신을 향하여!"라는 목표를 가지고 "회의론과 독단주의, 불신과 미신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보았다.[286]

1937년 "종교와 자연과학(Religion und Naturwissenchaft)"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플랑크는 신성의 상징과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러한 상징이 신성의 불완전한 표현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285] 그는 무신론이 상징에 대한 조롱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하는 한편, 신자들이 상징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경고했다.[285]

플랑크는 모든 종교에 대해 관대하고 호의적이었으며, 루터교 신자로 남았지만, 기독교나 성경적 견해를 옹호하지는 않았다.[284][286] 그는 "기적에 대한 믿음은 과학의 사실이 꾸준하고 확고하게 전진하기 전에 단계적으로 양보해야 하며, 그 완전한 패배는 의심할 바 없이 시간 문제이다."라고 믿었다.[286]

플랑크는 신이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신격의 거룩함은 상징의 거룩함으로 전달된다"고 말했다.[286] 그는 무신론자들이 단순한 상징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286]

과학사가 존 L. 헤일브론은 플랑크의 신에 대한 견해를 이신론적인 것으로 보았다.[290] 플랑크는 자신이 항상 깊이 종교적이었지만, "기독교 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 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291]

4. 2. 나치 정권 시기

플랑크는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제국 총리가 된 이후 시작된 유대인 박해에 대해 초기에는 대대적인 비판을 하지 않았다.[140] 주변 동료들의 항의 사임 시도에도 불구하고, 플랑크는 그만둘 것을 만류했다.[140] 정권의 눈에 띄어 사임한 후에 좋지 않은 인물이 후임이 되는 것보다, 앞으로 독일 과학을 위해 사임하지 않고 젊은이들을 지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34]

같은 해 3월, 미국에 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독일 귀국을 거부하고 나치 비판을 시작하자,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에게 당신과 같은 민족,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억압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135][136] 같은 해 5월 아카데미에서도 아인슈타인이 아카데미를 떠나는 것은 유감이지만, 요하네스 케플러아이작 뉴턴만이 비교될 만한 업적을 남겼다고 덧붙여 아카데미가 아인슈타인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오해를 막고자 했다.[137][138]

플랑크는 히틀러를 직접 만나 유대인도 다양하니 구별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은 "가시"처럼 뭉쳐 다니므로 구별은 유대인 자신들이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므로 모든 유대인을 같은 기준으로 다룬다고 반박했다. 플랑크는 더 응답했지만, 결국 히틀러의 분노를 사 상황을 개선할 수 없었다.[139][140]

또한 플랑크는 카이저 빌헬름 협회 산하 연구소 개소식에서 "하일 히틀러"라는 인사를 해야 했지만, 손을 반쯤 들었다 내렸다 하는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한 후에야 손을 들어 "하일 히틀러"라고 말했다.[141][142]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독일을 떠난 가운데, 프리츠 하버 역시 나치와 의견이 대립하여 1933년에 국외로 추방되었고 이듬해 사망했다. 플랑크는 막스 폰 라우에의 요청에 따라 하버의 1주기 추도식을 주최했고, 정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143]

1936년, 플랑크의 카이저 빌헬름 협회 회장 임기가 만료되었다. 후임으로 요하네스 슈타르크가 입후보했지만, 그는 플랑크와 아인슈타인 등을 비판했던 친나치 과학자였다. 협회는 슈타르크 대신 카를 보쉬를 차기 회장으로 선출하여 1937년에 인계가 이루어졌다.[144]

1938년, 플랑크의 80세 생일 기념식에는 많은 관계자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막스 플랑크 메달 수여가 있었는데, 플랑크의 희망에 따라 프랑스인 루이 드 브로이가 수상자로 결정되었다.[147] 또한 새로 발견된 소행성 1069번에 플랑크의 이름을 딴 프랭키아(Plankia)라는 이름이 붙여질 것이 발표되었다.[148]

1938년 12월 22일, 플랑크는 26년간 역임한 아카데미 상임 이사직을 사퇴했다.[149][150]

나치 정권 하에서 플랑크는 카이저 빌헬름 협회에서 책임 있는 지위에 있었고, 인간적으로도 신뢰받고 있었다. 플랑크는 나치의 정책에 비판적이었지만, 나치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지는 않았다.[226] 이는 플랑크가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머지않아 분별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227] 필립 볼(Philip Ball)은 플랑크를 비롯한 당시 과학자들이 나치의 정책에 반대한 것은 독일 과학을 위해서였고, 동료 유대인을 돕기 위해서였지, 더 넓은 도덕적 관점에서 생각해서 반대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228]

4. 3. 제2차 세계 대전과 죽음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 플랑크의 둘째 아들 에르빈은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혔고, 장남 카를은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했다.[46] 그레테는 1917년 첫 아이를 출산하던 중 사망했다. 그녀의 여동생은 2년 후 그레테의 홀아비와 결혼한 후 같은 방식으로 사망했다. 두 손녀는 살아남았고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플랑크는 이러한 상실을 꿋꿋하게 견뎌냈다.

1945년 1월, 그에게 특히 각별했던 에르빈 플랑크는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시도 실패에 가담한 혐의로 나치 국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르빈은 1945년 1월 23일에 처형되었다.[46]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플랑크, 그의 두 번째 아내, 그리고 그들의 아들은 괴팅겐의 친척에게로 갔고, 플랑크는 1947년 10월 4일에 괴팅겐에서 사망했다. 그는 괴팅겐의 구 시립 묘지(알테 슈타트프리트호프)에 묻혔다.[47]

4. 4. 유산과 영향

플랑크는 독일 루터교 교인이었다.[283] 그는 대안적인 견해와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했다.[284] 1937년 "종교와 자연과학(Religion und Naturwissenchaft)"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그는 상징과 의식의 중요성은 신자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능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만, 상징은 신성의 불완전성을 제공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무신론이 그러한 상징에 대한 조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한편 신자들이 그러한 상징의 중요성을 과대 평가한다고 경고했다.[285]

플랑크는 모든 종교에 관대하고 호의적이었다. 그는 루터교에 남아 있었지만 기독교나 성경적 견해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는 "기적에 대한 믿음은 과학의 사실이 꾸준하고 확고하게 전진하기 전에 단계적으로 양보해야 하며, 그 완전한 패배는 의심할 바 없이 시간 문제이다."라고 믿었다.[286]

"종교와 자연과학"에서 플랑크는 신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견해를 표현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신격의 거룩함은 상징의 거룩함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신론자들이 단순한 상징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20년부터 죽을 때까지 교회 관리인이었고 전능하고 전지전능하며 자비로운 하나님을 (반드시 인격적인 신은 아니더라도) 믿었다. 과학과 종교는 모두 "신을 향하여!"라는 목표를 가지고 "회의론과 독단주의, 불신과 미신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286]

1944년 플랑크는 "가장 명석한 과학, 즉 물질 연구에 평생을 바친 사람으로서 원자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물질은 없다. 모든 물질은 원자 입자를 진동시키고 원자의 이 가장 미세한 태양계를 하나로 묶는 힘에 의해서만 발생하고 존재한다. 우리는 이 힘 뒤에 의식적이고 지적인 정신(geist)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정신은 모든 물질의 모체이다."라고 하였다.[287]

플랑크는 신의 개념이 종교와 과학 모두에 중요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종교와 과학 모두 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신자들에게 신은 시작에 있고 물리학자들에게는 신이 모든 것의 고려의 끝에 있다. ... 전자에게 그분은 기초가 되고, 후자에게 모든 일반화된 세계관의 구성체의 왕관이 된다."[288]

나아가 플랑크는 이렇게 썼다.

> ..."믿는다"는 것은 "진리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의심의 여지 없이 안전한 길로 계속하여 발전하는 자연에 대한 지식은, 자연 과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사람이, 자연의 법칙과 모순되는 이례적인 사건과, 종교적 교리에 대한 필수적인 뒷받침과 확인으로 여전히 일반적으로 간주되며 이전에는 의심이나 비판 없이 순수하고 단순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기적에 관한 다수의 보고가,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중단없이 믿음직스럽게 진보하는 과학 앞에서 점차적으로 물러나야 하며, 우리는 이것이 조만간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289]

저명한 과학사가 존 L. 헤일브론은 신에 대한 플랑크의 견해를 이신론적이라고 규정했다.[290] 하일브론은 나아가 자신의 종교적 계열에 대해 물었을 때 플랑크는 자신이 항상 깊이 종교적이었지만 "기독교 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 신"은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것을 관련짓는다.[291]

1932년 저서 『과학은 어디로 가는가』(Wissenschaftliche Selbstverständigung)에서 플랑크는 종교와 과학에는 진정한 대립이 없으며,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발휘하려면 자신의 종교적인 부분을 인식하고 계발해야 하며, 이것은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경험하는 바일 것이라고 언급했다.[218]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지식은 추론에서가 아니라, 외계가 존재하고 직접적인 인식으로부터 얻어진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이성만이 아닌 직접적인 인식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본질적으로 신앙과 유사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과학에는 미지의 것에 대한 탐구심이 있으며, 진실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깊게 하는 것이지만, 형이상학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데 있어 과학은 종교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218]

1937년 5월 강연 "종교와 과학"에서는 종교적인 인간과 과학자를 다루면서, 둘 다 보편적인 질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논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 보완하는 것이며, 각 개인은 종교적인 측면과 과학적인 측면을 모두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19] 이 강연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열렸고 호평을 받았다. 에서의 강연에서는 마지막 부분인 "신을 의식하라"는 구절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220] 또한, 강연 내용은 출판될 뿐만 아니라 신문에서도 소개되었다.[220]

5. 종교적 견해

플랑크는 독일 루터교회 신자였다.[48] 그는 다른 견해와 종교들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었다.[49] 1937년 "종교와 자연과학(Religion und Naturwissenschaft)"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그는 신앙인의 신앙 행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상징과 의례의 중요성을 시사했지만, 그 상징이 신성을 불완전하게 묘사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신론이 그러한 상징을 조롱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신자들이 그러한 상징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50]

"종교와 자연과학"에서 플랑크는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견해를 표명했고,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신성함은 상징의 신성함을 통해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신론자들이 단순히 상징에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2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교회 장로였으며, 전능하고, 전지전능하며, 자비로운 신을 믿었다. 과학과 종교 모두 "불신과 독단, 불신앙과 미신에 대한 끊임없는 싸움"을 벌여 "신을 향하여!"라는 목표를 달성한다.[49]

플랑크는 1944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명석한 과학, 즉 물질 연구에 평생을 바친 사람으로서, 원자에 대한 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것만큼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물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물질은 원자의 입자를 진동시키고 원자라는 가장 작은 태양계를 하나로 묶는 힘에 의해서만 생겨나고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힘 뒤에 의식적이고 지적인 정신(geist)의 존재를 가정해야 합니다. 이 정신이 모든 물질의 기반입니다."[51]

플랑크는 신의 개념이 종교와 과학 모두에 중요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종교와 과학 모두 신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신자들에게 신은 시작에 있고, 물리학자들에게는 신이 모든 고찰의 끝에 있습니다... 전자에게는 기초이고, 후자에게는 모든 일반화된 세계관 건물의 정점입니다."[52]

또한 플랑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믿는다"는 것은 "진실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안전한 길을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는 자연에 대한 지식은 자연과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자연 법칙에 어긋나는 특별한 사건에 대한 많은 보고서, 즉 기적에 대해 진실에 근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그리고 확실하게 발전하는 과학 앞에서 한 걸음씩 물러서야 하며, 조만간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53]


저명한 과학사학자인 존 L. 하일브론(John L. Heilbron)은 플랑크의 신에 대한 견해를 자연신론적이라고 묘사했다.[54] 하일브론은 또한 플랑크에게 그의 종교적 성향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는 항상 깊이 종교적이었지만 "인격적인 신은 고사하고 기독교 신조차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전했다.[55]

1932년 저서 『과학은 어디로 가는가』(Wissenschaftliche Selbstverständigung)에서 플랑크는 종교와 과학에는 진정한 대립이 없으며,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발휘하려면 자신의 종교적인 부분을 인식하고 계발해야 하며, 이것은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경험하는 바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여, 이성만이 아닌 직접적인 인식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본질적으로 신앙과 유사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과학에는 미지의 것에 대한 탐구심이 있으며, 진실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깊게 하는 것이지만, 형이상학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데 있어 과학은 종교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218]

1937년 5월 강연 "종교와 과학"에서는 종교적인 인간과 과학자를 다루면서, 둘 다 보편적인 질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논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 보완하는 것이며, 각 개인은 종교적인 측면과 과학적인 측면을 모두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19]

6. 사상

플랑크는 독일 루터 교회 신자였지만,[48] 다른 견해와 종교에 대해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49] 1937년 "종교와 자연과학" 강연에서 그는 신앙의 상징과 의례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이러한 상징이 신성을 불완전하게 묘사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신론의 상징 조롱과 신자들의 상징 과대평가를 모두 비판했다.[50]

플랑크는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하며,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신성함은 상징의 신성함을 통해 전달된다"고 믿었다.[49] 그는 무신론자들이 상징에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192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교회 장로였으며, 전능하고 전지하며 자비로운 신을 믿었지만, 반드시 인격적인 신은 아니었다.[49] 과학과 종교 모두 "불신과 독단, 불신앙과 미신에 대한 끊임없는 싸움"을 벌이며, "신을 향하여!"라는 목표를 추구한다고 보았다.[49]

플랑크는 종교와 과학 모두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며, 신자에게 신은 시작에, 물리학자에게는 모든 고찰의 끝에 있다고 말했다.[52] 그는 종교가 기초이고 과학이 모든 일반화된 세계관 건물의 정점이라고 보았다.[52] 또한, 플랑크는 "믿는다"는 것은 "진실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 법칙에 어긋나는 기적에 대한 믿음은 과학 앞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53]

존 L. 하일브론은 플랑크의 신에 대한 견해를 자연신론적이라고 묘사했다.[54] 플랑크는 종교적 성향에 대한 질문에 항상 깊이 종교적이었지만 "인격적인 신은 고사하고 기독교 신조차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55]

플랑크는 철학자로서의 측면도 있었다. 신학자 아돌프 폰 할나크는 플랑크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철학자로 언급했다.[209] 플랑크는 초기에는 에른스트 마흐의 영향을 받았으나,[210] 루트비히 볼츠만의 원자론을 받아들이면서 마흐의 생각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211] 1908년 라이덴 강연에서 마흐의 과학철학을 비판했다.[212][213]

플랑크는 물리학이 통일된 세계에서는 인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여러 상수를 기반으로 한 보편적인 설명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214] 마흐 철학은 인간의 감각에만 실재성을 인정하여 플랑크의 생각과 대립했다.[215] 플랑크는 원자도 실재적이라고 주장했다.[215]

1932년 저서 『과학은 어디로 가는가』에서 플랑크는 종교와 과학에는 진정한 대립이 없으며, 인간은 종교적인 부분과 과학적인 부분을 모두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218]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여 직접적인 인식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과학은 형이상학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데 있어 종교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218]

1937년 5월 강연 "종교와 과학"에서 종교적인 인간과 과학자는 모두 보편적인 질서를 추구하며 서로 보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19] 이 강연은 여러 나라에서 호평을 받았다.[220]

7. 평가

플랑크는 흑체 복사 공식을 도출하고, 이로부터 양자 가설을 제시하여, 이후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등에 의해 확립된 양자역학의 기초를 놓았다. 이 업적으로 플랑크는 “양자론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노벨 물리학상(1918년)을 수상했다. 플랑크의 노벨상 수상에는 로렌츠, 아인슈타인, 봄, 빈, 좀머펠트 등 많은 물리학자들의 추천이 있었고, 라우에는 양자 물리학으로 노벨상이 주어진다면 우선 플랑크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225] 플랑크가 제시한 흑체 복사 공식은 곧 실험적으로 확인되었고 과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221] 그러나 거기서 도출되는 양자 가설은 1905년까지 독일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받지 못했다. 서호정자는 양자 가설이 당초 독일 국내에서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은 플랑크가 볼츠만의 생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볼츠만에 반대하던 과학자들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222] 독일 국외에서도 레일리와 제임스 진스가 1905년에 흑체 복사 공식에 주목했지만, 양자 가설에 대해 언급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었다.[222][223]

나치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대, 플랑크는 카이저 빌헬름 협회(Kaiser-Wilhelm-Gesellschaft)에서 책임 있는 지위에 있었고, 인간적으로도 신뢰받고 있었다. 플랑크 자신은 나치의 정책에 비판적이었지만, 나치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지는 않았다.[226] 이는 플랑크가 당초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머지않아 분별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한 원인이다.[227] 필립 볼(Philip Ball)은 플랑크를 비롯한 당시 과학자들이 나치의 정책에 반대한 것은 독일 과학을 위해서였고, 동료 유대인을 돕기 위해서였지, 더 넓은 도덕적 관점에서 생각해서 반대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228] 그리고 “플랑크에게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타고난 마음의 선함 이상의 윤리 기준도 없었으며, 아무런 전례도 역사적 모범도 없었다. 그리고 그를 삼켜 버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를 짓밟아 버리는 고난에 대해, 플랑크를 잘 이끌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229]

8. 주요 수상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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